급변하는 의료환경, 뒤쳐진 의료법…곳곳 충돌[쪼개진 의료계上]
고령화 시대 보건의료환경 급변…의료계 갈등 다양화·첨예화
의료직역간 갈등, 의료계 불신 키우고 사회통합 저해할 우려
간호법·의료기기·전문약사제도…갈등 깊어질수록 국민 피해로
"의료체계 근간 의료법, 의료환경 변화 반영 못해 갈등단초로"
[서울=뉴시스]고령화 시대 만성질환자 증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도입, 코로나19 팬데믹 등 보건의료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의료계 내부의 갈등도 다양화·첨예화되고 있다. (자료= 뉴시스DB) 2022.09.23
의료직역 간 갈등은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결국 환자, 국민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 전문가들은 직역 간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객관적 근거를 기반으로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국민의 편익을 따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갈등 해결을 위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가장 최근 의료계 내부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전문약사제도 정비다. 전문약사제도란 고령화 시대 만성질환자 증가에 따라 약사가 단순히 처방전에 나온대로 약을 조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임상시험 참여, 환자 맞춤형 약물 관리 등을 통해 전문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20년 4월 신설됐다. 전문의, 전문간호사, 전문치과의사가 있듯 전문약사를 더 많이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오는 2023년 4월 전문약사제도 시행을 앞두고 보건복지부는 하위법령 마련에 나섰고 '의사 진료영역 침범' 여부가 의사와 약사 간 갈등의 핵으로 떠올랐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전문약사제도 하위법령 마련을 위한 1·2차 전문약사제도 연구용역 보고서를 근거로 약사가 약사법에 규정된 업무범위인 '의사의 처방에 의한 조제 및 복약지도'를 넘어서 의료법을 위반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정근 의협 상근부회장은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약사가 약물치료, 건강상담 등 의료법을 위반하는 무면허 의료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의료법 위반 소지가 전부 사라진 전문약사법 세부규정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약사회는 전문약사제도는 환자의 안전과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한 서비스로, 의사의 고유 권한인 진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며 맞서고 있다. 최미영 대한약사회 부회장(전문약사제도협의회장)은 "상위법인 약사법에 전문약사의 행위가 규정돼 있어 진료권을 침해할 어떤 소지도 없다"고 반박했다.
전문약사제도 정비를 두고 의사와 약사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현재 '약료'의 정의가 불분명해 전문약사의 업무범위가 명확하지 않아서다. 약료는 지금까지 약사사회에서 '의약품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약사가 행하는 모든 활동'으로 통용돼 왔지만, 법적인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는 "(전문약사제도협의회에서)약료의 개념도 시행령 초안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의협은 "전문약사제도 연구용역 보고서에 의사가 중심이 되는 방문약료서비스, 환자안전서비스도 약료서비스 사례로 나온만큼 약료의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정부에 거듭 요구하고 있다.
이달 말 전문약사제도 하위법령 마련을 위한 3차 연구용역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복지부는 내달 말까지 전문약사제도를 정비한다는 방침이지만, 의협이 전문약사제도 세부규정이 진료영역을 침범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의약분업 파기를 선언할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인 데다 복지부 장관 자리도 공석이여서 예정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
[서울=뉴시스] 의료직역 간 끊임없는 갈등은 의료계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 있고 자칫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래픽= 전진우 기자) 2022.09.23
지난 2013년 말 시작된 의사와 한의사 간 의료기기 사용을 둘러싼 법적 분쟁도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따라 10년째 끊이지 않고 있다. 컴퓨터단층촬영(CT), 피부질환 치료 레이저시술법(IPL), 근육 내 자극 치료법(IMS), 약침 등 상대 영역에서 사용해 오던 의료기기를 다른 직역에서 사용할 수 있느냐가 갈등의 핵심이다.
지난 2013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안압측정검사기 등 5개 의료기기를 사용해 기소유예 처분을 당한 한의사에게 위법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듬해 12월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문제를 규제개혁 대상에 넣었지만, 의협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의사와 한의사 간 갈등이 깊어졌다.
최근 의협과 한의협이 각을 세우고 있는 의료기기는 초음파 기기다. 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 관계자는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봤듯 한의사의 초음파기기 사용은 불법으로 사용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면서 "한의사가 초음파 기기를 사용해 검사 과정이나 검진 후 판독에 오류가 있을 경우, 질병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치료가 잘못돼 국민건강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주장했다. 지난 2020년 6월 헌법재판소는 한의사가 초음파 골밀도 측정기를 사용한 것은 무면허 의료행위에 해당한다는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한의사는 한방 의료와 한방 보건지도를 임무로 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에 대해 문영춘 한의협 기획이사는 "한방 의료행위의 질적 향상을 위해 의료 진단기기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침치료, 약침 시술을 할 때 초음파 장비를 이용하는 것은 실시간 정확히 시술하기 위한 것으로, 검진의 정확도는 직역이 아닌, 개인역량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한의약육성법에 따르면 한방 의료행위를 과학적으로 응용해 발전시키는 것까지 한방 의료행위에 포함된다"며 "한국한의학연구소에서 개발한 '아큐비즈'(침시술용 초음파 기기)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한의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사와 한의사가 의료기기 사용을 두고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것은 '의료법'을 비롯한 관계 법령에서 의료행위와 한방 의료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의료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의료와 한방의료로 면허체계가 이원화된 상태에서 각 학문의 발전과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라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것도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실제 의료영역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수요가 늘고 있고 AI, 빅데이터 등 신기술의 발달로 의료기기도 세분화·첨단화되고 있다.
간호법을 둘러싼 갈등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3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 1년 넘게 보건의료 직역 간 갈등이 지속되면서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한간호협회·대한한의사협회와 이를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간협은 "초고령 사회 진입과 만성질환 증가에 따른 간호인력 수요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대유행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변화하는 보건의료 환경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간호법을 기반으로 숙련된 간호인력을 양성해 국민 건강과 환자 안전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의협 등 보건의료단체들은 "간호법은 간호사의 권리와 이익에만 국한돼 있어 모든 보건의료인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기존 보건의료인력지원법 개정을 통해 논의해야 한다"면서 "간호법이 국회를 최종 통과하면 대대적인 총궐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간호법을 두고 의사와 간호사가 정면 충돌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인 의료법이 1951년 제정된 이후 의료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강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행정발전센터 연구교수(행정학 박사)는 "간호사는 의료기관 내 간호업무에만 한정되지 않고 지역사회의 학교, 요양시설, 기업 등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의료법상 업무범위 등에 관한 규정이 미흡하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이 규정된 업무 외에 처방, 수술처치 등에도 투입되면서 결국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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