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들만 나오는 뮤지컬, 정영주 '베르나르다 알바'
뮤지컬 '씨 왓 아이 워너 씨'로 알려진 미국 뮤지컬 작곡가 겸 극작가 마이클 존 라키우사(56)의 또 다른 작품 '베르나르다 알바'를 번역하는 중이었다.
라키우사는 새롭고 낯선 형식의 마니악한 작품을 만들며 '미국 뮤지컬의 새로운 미래'로 통하는 인물. '베르나르다 알바'는 20세기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삼았다.
1930년대 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숨 막힐 정도로 무더운 어느 여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을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비극을 묘사했다. 2006년 링컨센터의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인 미지 E 뉴하우스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12년 만에 한국 첫 선을 앞두고 있다.
정영주는 23일 서울 성수동 우란문화재단에서 "일부러 들춰내서 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숨길수록 흠 되지 않을 본능에 대한 이야기에 충실해요"라고 말했다.
작품에는 남성 중심의 지독한 폭력 구조의 사슬을 답습해 억압적인 '베르나르다 알바' 역의 정영주를 비롯해 대학로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황석정, 이영미, 정인지, 김국희, 오소연, 백은혜, 전성민, 김히어라, 김환희 등 40대부터 2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다. 하지만 '여'라고 구분하지 않아도, 배우로서 활약상이 돋보이는 이들이다. 알바의 미혼인 5명의 딸들, 알바네 하인 등을 연기한다.
정영주는 "무대 위에서 10명의 여자 배우가 공연하지만 작품은 인간 자체의 이야기"라면서 "박천휘씨에게 '한국에서 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는데, 4년 반이 지난 지금 제게 제안이 왔을 때 '당연히 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중년여성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메노포즈' 등이 있지만 뮤지컬 주관객층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서, 모든 배역을 여성으로만 등장시키는 건 이례적이다. 정영주도 "여자 배우 열명만 함께 무대에 오른 건 처음이에요. 사명감 하나로 뭉쳤죠"라고 했다.
TV드라마를 오가는 정영주는 뮤지컬계를 일군 배우다. 1994년 뮤지컬 '명성황후'로 데뷔한 이후 '서편제' '넥스트 투 노멀' '모차르트!' '레베카' '팬텀' 등에 나왔다.
최근에는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 출연했는데 뮤지컬에서 이례적으로 '고뇌하는 남성'이 아닌 '힘 없고 늙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목 받았다.
하지만 결국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듯 '베르나르다 알바'도 '사람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에 배우들도 단순히 여자 이야기라고 해서 모인 것보다 괜찮은 배우들 10명이 '으쌰으쌰'한 것이 크거든요. 젠더만 생각하기보다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시켜 보면 더 다양한 재미가 있어요."
공감 요소가 큰 덕분에 24일부터 11월12일까지 좌석은 티켓 오픈 2분만에 매진됐다. 정영주는 "이런 매진은 뮤지컬한 지 25년 만에 처음이에요. 정말 방탄소년단이 된 줄 알았다"며 웃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아르헨티나 출신 구스타보 자작 연출은 "'베르나르다 알바'는 세계 어디에서든 공감할 수 있는 지구적인 콘셉트"라면서 "세대 간의 차이, 억압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 자유를 부르짖는 이야기 등이 녹아 있다"고 했다. "한국적인 감성에 맞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영주씨가 한(恨)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그런 부분에 신경을 썼다"고 부연했다.
예명 '23'을 함께 사용하는 김성수 음악감독이 각 캐릭터에 맞게 음악에 생명력을 부여했고, 플라멩코 안무가 이혜정이 한국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 장르의 리듬과 테크닉을 배우들에게 전수했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우란문화재단이 성수동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공연·전시 기획 사업인 '우란시선'의 첫번째 기획공연이기도 하다. 우란문화재단은 동빙고동 시절에도 무용극 '클럽살로메', 연극 '비(BEA)', 피지컬시어터 '그, 것' 등 상업 논리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박천휘 작가는 "라키우사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잘 하지 않고, 두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는데 흥행하지 못했다"면서 "한국뮤지컬계에도 상업적인 시장에서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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