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⑰15살 때 독살된 충정왕 묘 협소, 표석도 없어
문인석 관모(冠帽) 조각 형태가 변화
북, 보존유적 제550호로 지정 관리
총릉 전경 사진 첫 공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7. 강화도로 귀양 갔다 독살당한 충정왕(고려 30대 왕)의 무덤 총릉(聰陵)
1905년 7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이 도굴됐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방금 개성 부윤(開城府尹) 최석조(崔錫肇)의 보고서를 보니, 음력 6월 11일 밤에 부(府)의 남쪽 배야동리(排也洞里)에 있는 고려조 충정왕(忠定王)의 총릉(聰陵)을 파헤쳤는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여섯 자 남짓이 되고 깊이는 어두워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총릉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개성에 있는 여러 고려 왕릉이 도굴됐다는 보고를 받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9월에 “개성부에 있는 여조(麗朝)의 정종(定宗) 안릉(安陵), 능현(陵峴) 제2릉, 월로동(月老洞) 제1릉ㆍ제2릉, 칠릉동(七陵洞) 제4릉, 예종(睿宗) 유릉(裕陵), 충정왕(忠定王) 총릉(聰陵), 공민왕(恭愍王) 현릉(玄陵),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정릉(正陵)의 능위를 개수하는 일을 마친 뒤에 치제(致祭) 하도록 명”을 내렸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두 달 전이다. 대한제국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고려 시대의 왕릉과 무덤에 대한 도굴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대한제국 말기까지도 충정왕의 무덤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 전경. 고려 후기 왕릉의 조성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드론을 이용해 찍은 사진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총릉은 개성성의 남소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다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지점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기도 개성군 청교면 유릉리였고,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오산리에 속한다. 총릉의 서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고려 16대 예종(睿宗)의 유릉(裕陵)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용수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들로 낮은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변에 정종의 안릉을 비롯한 여러 고려 왕릉과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뒤쪽 모습. 총릉의 주변은 낮은 구릉 지대이고, 주변에 고려 왕릉과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다. 가장 끝에 보이는 능선이 진봉산이고, 그 너머에 개성공단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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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왕(1338년~1352)은 12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강화도로 귀양 가서 다음 해 15살의 어린 나이로 독살됐다. 충정왕은 묘호(廟號)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성할 충(忠) 자를 넣은 마지막 임금으로, 29대 충목왕(忠穆王)의 배다른 동생이고, 이름은 왕저(王)이다. <고려사>에는 “충정왕이 1352년(공민왕 1) 3월에 별세하자 7월 계유일에 소략하게 장례 지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사>의 기록대로 그의 무덤은 협소하고, 관대(棺臺)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다. 1910년대에 작성된 일제의 조사보고서에는 “높이 8척, 지름 21척이며, 병석(屛石)은 천연석으로 만들어졌다. 망주석(望柱石) 1쌍을 팔각형으로 상부를 보주형(寶珠形)으로 조각하였고, 석인(石人) 2쌍과 석수(石獸)가 유존하고 있으며, 정자각(丁字閣)의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서울=뉴시스] 1916년경에 촬영된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 모습. 조선 고종 때 세운 표석(表石)이 확인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능 앞에 고종 때 세운 표석(表石)이 있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근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총릉의 전경 사진을 보면 4단으로 이뤄진 고려 왕릉의 모양새에 맞게 정비해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이 세운 표석을 통해 ‘보존유적 제55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서울=뉴시스] 지난해 촬영된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정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 앞에 북한이 세운 표석. ‘보존유적 제550호’로 지정돼 관리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최근 촬영된 사진을 보면 무덤의 외부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며, 1층 단에 12각형의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봉분(封墳)과 난간석(欄干石), 망주석(望柱石) 등이 남아 있다. 난간석은 기둥만 있고, 상판이 없는 혼유석(魂遊石)이 봉분 앞에 있다.
망주석은 혼유석의 좌우에 한 기씩 서 있고, 석수(石獸)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석수는 일본강점기 때에 촬영된 사진에도 없었다. 2층 단에는 장명등(長明燈)의 받침대와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있으며, 3층 단에도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4층 단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고, 정자각 터(丁字閣址)만 확인된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봉분과 주변에 있는 난간석, 망주석. 조선 고종 때 세운 능비는 사려졌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서쪽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동쪽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1978년 북한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무덤 칸(墓室)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지하에 설치되었고, 관대(棺臺)는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의 높이는 2m, 직경은 6.2로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편이다.
무덤 칸의 크기는 남북 길이 3.88m, 동서 너비 2.2m, 높이는 1.88m로 조사됐다. 발굴 당시 청동합, 청동거울 등의 청동 제품들과 철제 자물쇠, 문장식판, 구슬, 판 못, 화폐(대관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서쪽에 서 있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동쪽에 서 있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총릉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문인석이다. 총릉에 남아 있는 4개의 문인석은 모두 평평한 형태의 평각(平角) 관모(冠帽)가 아니라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은 관모를 쓰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돼 있다.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공이 확인된 고려 왕릉 중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난 형태이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의 무덤인 총릉(聰陵)의 3단 서쪽의 문인석(왼쪽)과 동쪽의 문인석(오른쪽). 문인석의 관모가 이전 시기 평평한 형태의 평각(平角) 관모(冠帽)가 아니라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은 관모를 쓰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4.25. [email protected]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1123년(인종 1) 년에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 국왕은 ‘검은색의 높은 관모’(오사고모(烏紗高帽)를 썼다.
당시 송나라 황제와 신하 모두 기본적으로 평각 관모를 썼기 때문에 고려의 국왕들도 비슷한 형태의 관모를 썼을 것이다. 통상 조선 시대 국왕들이 쓴 익선관(翼善冠)은 고려 32대 우왕(재위 1374∼1388) 때 명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총릉에 세워진 문인석이 익선관 형태로 조각된 것으로 봐서 우왕 이전인 충정왕 때부터 이런 형태의 관모를 쓴 것으로 보인다. 충정왕 다음 국왕인 공민왕의 현릉(玄陵), 공민왕릉의 영향을 받은 조선 시대 왕릉의 문인석은 모두 익선관 형태로 조각돼 있다.
무덤의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북쪽의 칠릉군(七陵群) 중에서도 제1릉·2릉·4릉·5릉·7릉의 문인석은 평각 관모로, 제3릉과 6릉의 문인석은 익선관 형태로 조각돼 있다.
소릉군(韶陵群) 중에서는 제4릉의 문인석만 익선관 형태로 조각돼 있다. 따라서 고려 왕릉의 조성시기나 무덤의 주인공을 비정(比定)할 때 문인석의 관모 형태가 하나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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