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민중미술 대표작가 최민화의 변신
대형 상업갤러리와 첫 개인전
갤러리현대, 'Once Upon a Time'전 9월2일 개막
민초 담은 까칠한 '분홍'→'회색 청춘' 연작에서
무지개빛 화사한 동서고금 혼합한 '신화-역사화' 눈길
[서울=뉴시스] 화가 최민화. 사진=갤러리현대 제공. 2020.8.28. [email protected]
민중미술 대표 작가로 유명한 화가 최민화(66)가 국내 대형 상업갤러리와 손을 잡았다.
최민화 개인전 'Once Upon a Time'. 9월2일부터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펼친다. 이 최민화 개인전에 대해 미술을 알만한 사람들은 깜짝 전시라는 반응이다. 80년대를 이끈 민중미술 작가들이 21세기 들어 시들해졌고 설 무대도 줄어든 가운데 그나마 가나아트, 학고재에서 이들 작가 전시가 가끔 열렸지만 갤러리현대는 이름처럼 현대적인 그림만 취급했기때문이다. '돈되는 그림'의 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국내 최고 화랑인 현대화랑에서 최민화의 전시는 "세상 많이 변했네"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결국 이 전시는 '돈이 되는' 그림으로의 진입과 국내 현대미술사에 최민화의 작업을 다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전시로 평가받을 전망이다.
갤러리현대는 "작가와 갤러리현대가 함께 하는 첫 개인전"이라며 "작가가 1990년대말 처음 구상하고 20여 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동명의 연작 만을 모은 첫 번째 전시"라고 강조했다.60여 점의 회화와 40여 점의 드로잉과 에스키스가 함께 선보인다.
그래서일까. 이전 민초들을 담은 까칠한 '분홍' 연작과 달리 '노란빛'으로 화사한 신작 그림은 '어쩐지 상업적(?)'이다. 저항적인 이전 작품과는 달리 세련된 분위기도 풍긴다. 단색화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신선한 그림으로 미술사적 의미를 넘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전시장 작품만 봐서는 '최민화 그림' 같지 않다.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한 현실과 실존적 고민을 인물화로 포착해온 작가의 이번 전시는 최민화의 세계관이 '신화-역사화'로 확장됐음을 알린다.
[서울=뉴시스] 최민화, 유월 연작_파쇼에 누워 Ⅰ Lying on pasyoⅠ, 1992, Oil on canvas, 136x206cm.
◇'민중미술 대표 작가' 최민화는 누구...'민중은 꽃이다'
본명은 최철환. 1954년 서울 출신으로 신일중학교때 문예부, 미술반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만평을 그렸다. 그때 "처음으로 유화물감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이후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학과에 진학,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 미술교사로 지내다, 80년 광주 사태를 접한후 달라졌다. 84년 운동권 선후배들과 '서울미술 공동체'를 만들며 '민중미술 작가'로 뛰어들었다.
이름도 바꿨다. ‘민중은 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민화(崔民花)’를 예명으로 지었다. 그 이름처럼 최민화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민중’, 즉 이 시대를 하루하루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작품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다. 1976년 선보인 '부랑' 연작은 시작이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숨 가쁘게 진행된 근대화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부랑자’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적 붓질로 담은 작품이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입체 작품으로 표현한 '시민'을 '서울현대미술제'에 출품했지만 안기부의 검열로 강제 압수되었다.
1981년 한국을 떠나 미국과 멕시코에 거주했고, 이듬해 1년 2개월 동안의 해외 거주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부각된건 이한열 열사 영결식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이한열의 노제에서 사용되었던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가 주목되면서다. 가로 7m 세로 2.3m의 대작. 그는 이 작품을 "하루만에 오열하며 그렸다"고 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작업도 변해갔다. 6월 항쟁과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7년을 기점으로 순수 회화 작업으로 복귀한 그는 1988년 '부랑'연작을 마무리하고, '분홍'(1989-1999) 연작을 발표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향한 저항과 운동의 승리냐 실패냐의 기로에 놓인 인간의 조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이어 50대가 된 작가가 동시대를함께 사는 청춘들이 도시를 방황하며 배회하는 유령 같은 모습을 회색빛이 강조된 쓸쓸한 분위기의화면에 그린 '회색 청춘'(2005-2006) 연작으로 끊임없이 붓질해왔다.
민중미술 작가로 ‘근대적 인간 조건의 억압’에 맞서는 작업을 하던 그의 사고가 확장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했다. 태국과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한국의 전통적 서사와 그에 걸맞는 상징적 이미지의 부재를 절감했다는 것.
'부랑', '분홍', '유월', '회색 청춘' 등 문제적 연작을 이어가던 최민화는 '분홍' 연작을 마무리하던 1990년대 말부터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고대 시공간을 캔버스로 소환했다.
이번 전시 타이틀로 나온 새로운 연작 'Once Upon a Time'(옛날 옛날에)이다.
[서울=뉴시스] 최민화, 웅녀, 2020_캔버스에 유채_116.8x91cm.jpg
이 연작의 일부는 2003년 대안공간 풀(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된바 있다.
당시 '조선상고사 메모'(2003~) 연작을 발표하며, 역자학자가 아닌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화가의 창조적 관점에서 머나먼 옛 이야기를 한국적 ‘도상’으로 만드는, 방대하며 무모할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찬작업에 돌입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은 그야말로 역사를 증거하는 메모였다. 영화 홍보용 브로마이드나 상품 광고 포스터, 다른 사진가의 확대 복사한 사진 등 대량 생산된 이미지 위에 유화 물감으로 웅녀와 해모수, '공무도하가'와 '서동요'의 주인공 등을 그려 놓았다.
21세기에 들어 최민화는 미술사와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도상을 폭넓게 활용하며 메타 회화적 실험을 진행해 갔다. 인물화, 역사화, 풍경화 등 연작의 밑그림을 하나둘 발전시켜 2010년부터 새 연작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2018년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열린 대구미술관에 회고전에서 첫 선을보였다. 이번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은 연작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다.
[서울=뉴시스] 최민화,조선진(朝鮮津) – 공후인Ⅱ_2018_캔버스에 유채_97x130.3cm.jpg
◇'Once Upon a Time'(옛날 옛날에), 삼국유사 뼈대로 탄생
이전과 다른 작품처럼 보이지만 작가 최민화는 “내게 신화를 다루는 일은 오늘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작가는 "고대를 제대로 읽고, 알고, 느끼고, 보기 위해서는 국경과 민족, 인종과 종교 등을 엄격히 구분 짓는 서구의 근대적 역사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대의 풍요로운 상징 형식과 심오한 문화적 유산들을 당대의 회화적 언어, 나아가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 짓는 일이 이번 연작의 목표이자 제작 의도다."
새 연작 'Once Upon a Time'은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遺事)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서사적 뼈대로 삼았다.
"역사서에 담긴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 신화, 그렇게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먹여 살린 영웅의 탄생과 고난, 성장과 성공의 감동적 드라마, 생(生)과 사(死), 성(聖)과 속(俗), 농경과 유목의 삶이 혼재한 고대의 풍속과 생활문화, 희로애락이 깃든 인류 보편적인 흥미로운 이야기에 특별히 주목했다."
경계가 해체된 이미지의 조합, 변주, 배치, 생성은 최민화 특유의 방법론이다.
최민화는 이 연작을 위해 동서양의 신화적 종교적 도상들의 형체와 상징성을 다년간 연구했고, 1년에 1,2회 정도의 배낭여행을 떠나 본 광경을 내면화하며 수많은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완성했다.
동서고금을 대표하는 도상과 색감의 습합, 몇 개의 선만으로 캐릭터의 성격이나 장면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과감한 드로잉이 압도한다.
그려지는 대상과 비워 둔 배경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시각적인 구성이 특징인데 최민화는 이를 "그려진 여백”이라고 했다.
그림에는 동서양 미술사의 수많은 이야기가 엮여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와 풍속화, 도속화와 탱화의 한국 미술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르네상스 회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 미술을 종횡으로 아우른다.
화면은 '숨은그림찾기'처럼 신화의 인물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서울=뉴시스] 최민화, 신시(神市) 2020_캔버스에 유채_각 97x130.3cm (diptych).
환웅이 웅녀에게 마늘과 쑥을 건네는 단군 신화의 장면은 이브가 사과를 먹자며 아담을 유혹하는 성서의 한 장면과 중첩된다.
또 달빛 아래 밀애를 나누는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이 신라 시대 향가 '서동요' 속 선화 공주와 서동의 모습으로 인용되고 변주된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배경으로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속 인물들이 한 화면에 놓이는가 하면, 르네상스 회화 속 근육질의 남성상이 민화를 장식하던 잉어, 거북, 복숭아, 소나무, 학, 오리, 산호초, 괴석, 연꽃, 영지, 사슴 등의 아름다운 길상문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세계로 펼쳐진다.
색상도 무지개빛처럼 다채롭다. 그동안 분홍, 빨강, 회색, 마젠타 등의 특정 색채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이번 연작에서는 선명한 파스텔톤의 색감으로 완성했다. 한국의 오방색 전통과 힌두 문화의 문화적 색감을 혼성했다.
캔버스의 물성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한 필선도 눈길을 끈다. 물감을 엷게 칠하는 최민화만의 방식으로 한국화의 세필 기법을 연상시킨다. 마치 고대의 시공간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재생되는 분위기와 효과를 불러온다.
미술사학자 김계원은 "'Once Upon a Time'연작은 최민화가 누구보다 고도의 필력(筆力)과 기예를 갖춘 작가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최민화, 호녀, 2020_캔버스에 유채_90.9x72.7cm.
고대의 시공간과 그곳을 무대로 대서사의 장대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번 작품은 절제가 돋보이는 인물화와 붓질의 능숙함에 그림 보는 맛을 제대로 전한다. 근경과 중경, 원경 사이에서 몇 개의 겹을 이루듯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밀도 높은 화면에 끌려가듯 눈을 못떼게 한다.
민중들의 애달픈 모습을 무심히 담아온 그가 21세기 '신화 역사화'로의 확장된 붓질은 '신화의 인물들을 통해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공감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업화랑과 손잡은 덕도 크다. 갤러리현대의 전시 연출은 못난 그림도 '있어빌리티'하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지하 전시장에는 40년간 이어온 작가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열정과 탐구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다양한 질감의 종이와 캔버스, 나무판 등에 그려진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통해 만화, 퍼포먼스, 걸개그림 등으로 이어진 회화적 매체에 대한 작업이 연대기처럼 소개됐다. 전시는 10월11일까지. 관람은 무료.
[서울=뉴시스] 갤러리현대, 최민화 Once Upon a Time 지하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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