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년과 여성]①옷 속에 감춘 '2·8 독립선언서'…현해탄을 건너다
2·8선언서 "일본에 영원의 혈전 선언"
유학생 궐기 알리려 국내에 선언서 전달
모진 고문으로 병보석 석방, 평생 후유증
【서울=뉴시스】김마리아. (제공=국가보훈처)
이날 거행된 역사적인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유학생은 총 600여명. 몸은 왜적의 땅에 있지만 당시 일본 내 조선 유학생 단체는 독립운동단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2·8운동을 주도한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는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딘 학생들이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학우회 회원과 교제하지 않는 유학생은 '일본의 개'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바다 건너에 조국을 둔 그리움이 큰 탓일까. 조선 독립을 향한 이들의 열정은 일본 경찰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표면상으론 학우회 임원선거 총회였지만 모두 임원선거는 안중에도 없었다. 앞을 주시하는 27세 김마리아(1892~1944)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2019.02.22. [email protected]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렇지만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血戰)을 선언한다. (중략) 전항(前項)의 요구가 실패되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의 혈전을 선언한다."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9년 만에 등장한 독립선언서였다. 뒤이어 등장할 3.1 독립선언서엔 포함되지 않은 무력 항쟁을 경고한, 피 끓는 청년들의 독립선언서를 듣는 김마리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날 그는 일제에 투쟁하자고 열변을 토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회관을 지키던 경찰들이 난입해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 전원을 포함한 수십명이 끌려갔다. 김마리아도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지만 석방됐다.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은 한 번의 부르짖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복사해 옷 속에 감춘 채 2월17일 동경에서 출발해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일본 옷을 입었다.
재학 중이던 동경여자학원 고등과(당시 전문학교) 졸업이 3월로 예정돼 있었지만 이미 졸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재일 유학생들의 궐기를 조국에 알리고 조국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김마리아는 전라남도, 서울 등지를 오가며 유학생의 독립운동 현황을 알렸다.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가 벌인 독립운동 중 최대 규모였다.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수개월 동안 전국 곳곳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서울=뉴시스】3·1운동 당시 모습(제공=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직후인 3월5일 서울 학생들이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일본은 주동자를 찾아 처벌하려고 혈안이 됐다. 김마리아는 이미 요주인물이었다. 일제는 김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을 방문 조사하면서 김마리아를 배후자로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석방됐다.
그는 일본의 비인간적인 고문을 온몸으로 겪고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애국부인회) 활동에 몸을 던졌다. 1919년 10월 정신여학교 숙소에서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김마리아를 애국부인회 대표로 선출했다. 이들은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이다. 국권(國權)과 인권(人權)과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진할 따름이요, 후퇴하지 말자"고 밝혔다.
【서울=뉴시스】1929년 10월 26일자 중외일보 <그들의 소식,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감옥을 벗어나 이역으로 또 다시 학창생활에, 금의환향은 언제나 할려나? 떠드는 천지를 수놓던 김마리아양 >기사. 왼쪽 인물 사진은 김마리아. (제공=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 1920년 6월4, 5일자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 기사는 김마리아를 곁에서 간호한 이장경 등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김마리아의 건강 상태를 전했다.
"면회를 갔더니 마리아와 백신영과 이정숙 세 사람을 두 간수가 각각 부착해서 나오는 것을 보니까 그가 비록 목숨이 붙어있다 해도, 말하긴 흉하지만 송장 셋을 떼 메어 내어오는 듯하여 면회하러 갔던 우리 일행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금치 못해 그만 울고 말았다. 우리는 그 세 사람을 보석으로 내오지 못하면 도저히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다."
"우리가 (김마리아를) 보석으로 내올 때 약속하기를 외인과 면회를 한 일이 발각되면 보석을 해제하기로 했다. 의사 외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사람도 면회할 수 없으니 마리아는 늘 나에게 '형님 나의 병을 얼른 좀 낫게 해주시오. 그러면 나는 다시 감옥으로 가겠소. 나와서까지 이같은 구속을 받고, 차라리 감옥에 가서 있는 게 낫지 않겠소' 하고 하염없는 눈물을 짓는 때가 많다."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인 김마리아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조국에서 탈출시키기로 한다. 1921년 김마리아는 1개월이 걸려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이후 31세인 1923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녀가 조국으로 돌아가는 데 장장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1932년 꿈에 그리던 조국에 귀국한 그는 광복 1년 전인 1944년 3월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받다가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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