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파도처럼 요동치는 삶, 폭풍우에 휩쓸려간 희망…연극 '만선' [객석에서]

등록 2025.03.22 11: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

60년 지나도 빈곤·세대갈등 이야기 공감

5톤 분량의 물 붓는 폭풍우 씬 압도적

연극 '만선'의 공연 장면. (사진=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극 '만선'의 공연 장면. (사진=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한껏 기울어진 무대와 낡아 스러져 가는 양철집. 막이 오르기 전부터 곰치네의 위태로운 현실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간 곰치는 부서(보구치)를 가득 잡고 꿈에 그리던 만선으로 돌아온다. 빚을 청산하고, 자신의 배를 장만할 꿈에 부풀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선주 임제순은 빚과 이자를 갚으라며 잡아 온 부서를 모두 가져가고, 배를 묶어 버린다.

가진 것 없는 곰치네가 선주의 '갑질'에 맞설 방법은 딱히 없다.

"내가 눈 속에 흙 들 때까지 그물을 놓나 봐라"를 되뇌는 곰치는 다시 한번 '만선'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임제순과 터무니없는 계약을 맺고 빌린 배를 다시 바다에 띄운다. 아들 도삼과 연철의 만류에도 쌍돛까지 달고서.



그러나 발버둥을 칠수록 상황은 계속해서 최악으로 치달아만 가고, 결국 폭풍우와 함께 곰치네 가족은 붕괴된다.

극작가 천승세가 쓴 '만선'은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이다. 1960년대 산업화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서민들의 무력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한국적 사실주의 연극의 정수'로 손꼽힌다.

극작 후 60여 년이 흘렀지만, 벗어날수 없는 빈곤과 세대 갈등을 담은 이야기는 여전히 힘이 세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옭아매는 가난은 현재의 우리 곁에도 존재하는 만큼 "돈보다 상전이 워딧어"라는 대사에 냉혹한 현실을 실감케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살린 '말맛' 역시 살아있다.

만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곰치의 고집은 광기처럼도 보인다.

'뱃놈'으로 태어난 그가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만선 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곰치는 안 죽는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 동안 가족은 더 큰 불행으로 빠진다는 점에서 답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곰치의 아내 구포댁과 딸 슬슬이 등 여성 캐릭터들은 원작보다 당차게 바뀌었다.

슬슬이가 끝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 대체 믓이 만선이란 말이여?"를 곱씹을 때, 상실감과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극 초반 '연철'과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던 해맑은 슬슬이의 모습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5톤 분량의 물을 쏟아붓는 폭풍우 씬은 압도적이다.

폭우가 거듭될수록 곰치네 가족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거센 물줄기를 맞으며 울분을 토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극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공연장을 휘감는 냉기는 곰치네의 절망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하는 듯하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30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juhee@newsis.com

많이 본 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