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판례 변경…"국가의 불법행위, 손해배상해야"(종합)
"유신헌법 반대 금지" 긴급조치로 옥살이
국가에 손배소송 냈지만 1·2심, 패소 판결
2015년 대법 "정치적 책임만"→판례 변경
전합 "발령·수사·재판 모두 불법행위 해당"
대통령 개인 책임은?…대법관 의견 나뉘어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선고를 시작하고 있다. 이날 선고에선 박정희 정부가 발령한 '긴급조치 9호'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는지에 관한 판단이 나온다. 2022.08.3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김재환 기자 = 박정희 정부가 발령한 '긴급조치 9호'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뿐 아니라 수사·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불법행위이므로 국가가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은 정치적 행위라며 국민들에게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본 대법원 판례가 7년 만에 바뀐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A씨 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 등은 지난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긴급조치 9호는 지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1975년 5월13일 시행됐으며 이른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규정이었다.
A씨 등은 박 전 대통이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만한 위기상황이 아닌데도, 반대세력을 억압해 장기집권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고 주장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상 영장주의와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조치로,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발동한 것은 공무원으로서 위법한 직무집행에 해당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또 A씨 등은 수사관들이 영장 없이 자신들을 불법으로 체포·구금한 뒤 접견을 제한한 채 고문 등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며 소송을 냈다.
긴급조치 9호에 관해 전합은 지난 2013년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등을 심각하게 제한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무효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런데 1심과 2심은 지난 2015년 3월26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A씨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를 발동한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의 권리에 대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긴급조치권 행사는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이므로 민사상 불법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선고를 시작하고 있다. 이날 선고에선 박정희 정부가 발령한 '긴급조치 9호'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는지에 관한 판단이 나온다. 2022.08.30. [email protected]
하지만 전합은 이날 긴급조치 9호에 따른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9호가 앞선 전합의 판단에 따라 위헌·무효이며 이를 대통령이 발령한 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행위지만, 국민 개인에게 현실적인 손해를 입힌 건 아니라고 했다. 발령 행위 자체보단 이것을 적용·집행하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현실적인 손해를 초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즉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고, 수사기관이 그것에 근거해 영장 없이 체포·구금을 해 수사 및 기소한 뒤 법관에 의해 유죄 판결이 내려진 모든 과정이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는 게 전합의 설명이다.
전합은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이 위법행위가 아니라고 보고, 개별적인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행위가 불법인 경우에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본 기존 대법원 판례는 모두 변경하도록 했다.
이 사건처럼 대통령뿐 아니라 수사기관 및 법원 등 다수의 공무원이 광범위하게 관여한 국가작용으로 국민이 손해를 입었다면 전체적으로 불법행위가 성립된다는 취지다.
이 경우 국가가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사정(객관적 주의의무 위반)만 인정된다면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도 언급됐다.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선고를 시작하고 있다. 이날 선고에선 박정희 정부가 발령한 '긴급조치 9호'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는지에 관한 판단이 나온다. 2022.08.30. [email protected]
다만 대통령 등 공무원 개인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두고 대법관의 의견은 나뉘었다.
다수의 재판관과 안철상 대법관은 대통령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고 했다. 안 대법관의 경우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요건인 공무원의 고의·과실은 개인이 아니라 공적 직무수행상 과실, 즉 국가의 직무상 과실로 봐야 한다"고 했다.
반면 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긴급조치 9호는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발령하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집행한 것"이라며 "긴급조치 9호의 발령과 강제수사 및 공소제기라는 불가분적인 일련의 국가작용은 대통령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한 직무행위로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는 견해를 내놨다.
재판을 한 법관에 관해서도 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법관에게 부여된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헌법상 의무 등을 종합해보면 장 없이 체포된 피고인에 대해 인신보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유죄 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전합이 7년 만에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판결을 내놨지만, 이미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이 다시 소송을 내긴 어려울 전망이다. 전합 판결의 경우 과거 확정된 판결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인 사건은 이번 전합의 판례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긴급조치 9호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은 각각 대법원에서 24건, 하급심에서 약 9건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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