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간토대지진 후 조선인학생 귀국 막아…'학살' 퍼뜨릴까 경계"
마이니치 보도…조선인 학생 조사 사료 분석
日군인이 조선인 학생에 "학살 모습 퍼뜨려 귀국 어려워"
[사가미하라=AP/뉴시스]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생들의 귀국을 막는 등 이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 기록이 담긴 사료가 있다고 4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1일 당시 일본 총리 였던 기시다 후미오(왼쪽) 가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에서 합동 재난 훈련에 참여 중 간토대지진이 발생했던 11시59분에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는 모습. 2024.12.04.
[서울=뉴시스] 김예진 기자 =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생들의 귀국을 막는 등 이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 기록이 담긴 사료가 있다고 4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해당 사료는 국립공문서관에서 보관중인 '간토대지진피해상황조사 선인(鮮人·조선인)학생구호일건서류'다. 문부과학성에서 오랜 세월 보관되다가 2020년 국립공문서관으로 옮겨졌다.
현 일본 문부과학성의 전신인 문부성은 간토대지진 후 '조선학생구호부(이하 구호부)'를 설치하고 조선인 학생들을 조사했다.
신문은 간토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로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며 "사료에서는 당시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생에게 식량 배포 등의 지원을 하면서 박해가 민중운동으로 발전할 것으로 우려해 경계를 강화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구호부는 지진 후 9일 후인 1923년 9월10일 사무 작업을 시작했다. 사료에는 문부성이 출장소에 협조를 구해 경시청 등에 조선인 학생에 대한 '종전 취급 방법 및 감시 방법'을 청취했다고 기록돼 있다.
사료에는 각 출장소가 정리한 학생들에 대한 정보가 담겼다. 시부야(渋谷)출장소가 정리한 학생 명부에서는 성명과 소속학교, 구호 필요성과 평상시 행실 평가 등이 담겼다.
특히 학살에 대해 언급한 출장소도 있었다. 신주쿠(新宿)출장소는기록에 따르면 육군이던 나카노(中野) 병영에서 1923년 9월11일까지 시멘트 가마 운반을 명령 받은 조선인 학생이 귀국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 학생은 군인에게 "너희들은 도쿄(東京)에서의 선인 학살 모습을 귀국 후 선인에게 퍼뜨리기 때문에 귀국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아울러 신문은 "경시청에서도 조선인 귀국을 '저지'하도록 여러 번에 걸쳐 전달한 기록도 남아 있어 한반도 통치에 대한 영향을 경계하고 있었던 점을 엿볼 수 있다"고 전했다.
또 "한반도에서는 당시 (조선인) 학살을 둘러싼 발언을 '불온언동과 유언비어'로 단속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 역사에 정통한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학 교수는 이번 사료에 대해 "조선인 유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행정 당국의 활동이 있었던 점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들의 고난과 어려움이 기록돼 있어 사료로서 귀중하다"고 말했다.
도노무라 교수는 "지원을 하는 한편 민중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경계감, 조선인에 대한 박해를 (조선인 유학생들이) 계속 말한다면 곤란하다는 의식이 보인다"고 짚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대지진 당시 "재일조선인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본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6000여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정부 내 기록이 없다, 사실 관계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등으로 사실 관계 인정을 회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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