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빨간 산수화가 이세현의 일장춘몽 '레드, 개꿈'
【파주=뉴시스】이세현 '붉은 산수 200' (리넨에 유채, 372.5x932㎝, 2014)
2006년 런던 첼시예술대학 대학원 졸업전을 두 달 앞두고 작업이 시작됐다. 한국의 산천을 붉은색으로만 캔버스에 담아냈다. '붉은 산수'(Between Red)가 탄생한 시기다. 당시는 세계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렸던 때이기도 했지만 졸업전에 선보인 작품이 모두 팔리면서 유명해졌다. 인생역전의 순간이다. 런던 미술시장에서 먼저 알려진 후 2007년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빠르게 유명세를 탔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와 '붉은산수 작가'가 된 서양화가 이세현(48)이다.
붉은색 때문에 국내에선 '빨갱이 그림이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만, 붉은색만큼이나 강렬하게 각인된 작품은 작업실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중국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던 세계적인 컬렉터 울리 지그도 그의 작품 10여점을 가지고 있다. 국내 경매시장에서 낙찰이 잇따랐고 런던, 밀라노, 뉴욕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그의 작품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미국), 올 비주얼 아트(영국), 제임스 유 컬렉션(중국) 등 세계 곳곳에 소장돼 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그림은 '불타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들여다 보면 인간에 의해 파괴된 디스토피아다. 멀리서 보면 풍경화 같지만 쓰러져 가는 건물과 포탄의 흔적들이 삽입되어 한국의 아픈 기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통적인 한국의 산수화와 서양의 원근법이 결합됐다. 유학시절 '유럽의 유화' 벽에 부딪힌 흔적이다. '이 거대한 미술사적 전통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작가는 결국, 우리의 전통에서 찾았다. 겸재 정선(1676~1759)이나 표암 강세황(1713~1791)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했다.
작품은 이세현의 '관념 산수화'로 분류된다. 산수화는 종종 자연 그 자체를 그리는 풍경화라고 오해되지만 유가, 도가 등 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그리는 이의 관념 속 세상을 담는 것이다. 동양에서 산과 언덕, 강과 바다, 풀과 나무라는 산수는 도가 구현된 물상으로, 나아가 최고의 인격이 발휘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파주=뉴시스】작가 이세현
'붉은색'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북이 분단된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을 끼고 본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보초를 서며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움직임이나 위험을 감시하기 위한 행위였다. 하지만 야간 투시경을 통해 본 단색 풍경들은 온통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마음 속에 알지 못할 슬픔과 아픔이 느껴진 그때 그 풍경이다.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도 함께 일었다."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금기와 신성시된 핏빛의 붉은 색을 택한 이유다. '붉은 산수'는 사실적이면서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말처럼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인 풍경이며, 그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이다." 화면 곳곳에 군함, 포탄과 쓰러져 가는 건물 등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정체와 편린들이 실록처럼 기록됐다. 어릴 적 바라본 고향인 거제의 섬, 군대에서 보았던 DMZ, 뉴스를 통해 보는 한국의 비극적 사고 장면들이다.
처음에는 녹색으로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단지 아름답고 평범한 풍경화처럼 보였다. 좀 더 복합적이고 모순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붉은색으로 바꿨다."
'붉은 산수'로 미술시장에서 독보적인 브랜드가 됐지만 지난한 시절을 건너왔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4년 영국으로 가기 전까지 '무명의 설움'을 견뎌야했다. 조각·설치·드로잉 등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지만 17년간 한 점도 못 팔았다. 30대엔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알코올 중독자로까지 치닫게 했다. 붓을 버리고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드로잉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또 다시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고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파주=뉴시스】이세현 개인전 '레드-개꿈',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적어도 한 2년 정도만이라도 나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도 별다름이 없으면 그때는 진짜 포기하자." 그렇게 불혹이 넘은 나이에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 유학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초기엔 유럽인의 사회와 문화, 정치, 철학, 삶과 죽음, 현실과 역사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작업들이 매우 부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잘 맞는 옷일 뿐이라는 걸 절감했다. "내가 똑같이 입을 수는 없는, 본질부터 다른 것이었어요. 유럽 현대 미술을 따라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작업을 해온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웠죠"
10일부터 경기 파주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에서 신작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12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선보인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 '분재' 추상 작품이 아니다. 다시 '붉은 그림'을 소개한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특별기획전에 주변 인물을 등장시켜 광주의 역사적 아픔을 표현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이야기를 더 확장해내고 있다. 이전 붉은 산수에서는 인물을 제외한 풍경 자체만으로 현실을 비판했다면, 이번 작품에는 이야기 주체로 다양한 계층의 동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전시 제목은 '레드-개꿈'. 도가적 의미의 '일장춘몽'을 담았다. "부귀영화는 덧없고 세상살이는 한바탕 봄날 꿈과 같으니, 야심을 가진 사람들속에도 초연하게 인생을 보내겠다"는 표현이다. 그에겐 예술은 "일종의 기침 같은, 참거나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삶"이기 때문이다.
【파주=뉴시스】이세현 '붉은 산수015APR04' (리넨에 유채, 100x100㎝, 2015)
대하 역사 드라마같은 그림이다. 작가의 삶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및 역사적 현상들이 다큐멘터리처럼 담겨있다.
10년간 이어져서일까, '붉은 그림'은 모두 같아보인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색이다. 붉은색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나의 내면의 풍경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전시는 12월20일까지, 5000원. 031-95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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