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산불]터전 잃은 주민들 "집에 신발 한짝 안남아"
고성·속초 산불로 갈 곳 잃은 이재민들 사연
시집 와서 60년 살아온 집 잃은 80세 할머니
"남편은 나고 자랐고, 난 시집 와 60년 살아"
42세 여성, 엄마가 직접 지은 집 타버려 눈물
"집 때문에 대피소로 못 오겠다고 하시네요"
【속초=뉴시스】김경목 기자 = 5일 오전 강원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 주민들이 전날 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미시령 관통도로 요금소 인근에서 변압기가 터져 발생한 산불로 잿더미가 된 집을 보며 슬픔에 빠져 있다. 2019.04.05. photo31@newsis.com
강원도 속초, 고성 등을 집어삼킨 불이 잦아들기 시작한 5일 오전 10시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초등학교에 설치된 임시대피소는 지난 밤과는 달리 한산했다.
체육관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집 상태를 확인하거나, 옆집, 자녀 집 등으로 속속 돌아갔지만 갈 곳이 없는 20여명의 사람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에는 함상애(80)씨와 남편도 있다.
강원도 고성군 용촌 1리에 위치한 함씨의 집은 6·25 사변 이전부터 조상들이 살았으며 함씨 남편이 나고 자랐던 집이다. 함씨는 스무살 무렵 이 집으로 시집 와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함씨의 집에는 전날 저녁 7시30분께부터 불똥이 떨어졌다. 함씨는 갑자기 날아 온 불덩어리에 놀라 맨발로 집을 뛰쳐 나왔고, 그녀의 남편은 신고 있던 욕실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뛰어 나왔다. 60년을 살아온 집이 화염에 휩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미 다 확인했지, 아까 다시 가보니 집에 건질 게 하나도 없더라고. 가서 신발이나 하나 신고 나오려고 했는데 주방이고 뭐고 다 타버렸어."
함 할머니는 잿가루가 붙은 맨발을 보여주며 한탄했다.
집을 잃은 함씨 부부는 전날 밤 내내 길거리에서 잠을 청했다. 대피소로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을만큼 혼비백산한 밤이었다. 나름대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곳은 용촌다리, 개울가였다.
"어젯 밤에는 차 안에서 잤어, 길가에서. 용촌다리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는 질어서 불이 안 붙을 것 같더라고. 거기 차를 대 놓고 둘이 누워서 잤지 뭐."
이날 아침이 돼서야 함씨 부부는 아야진초등학교 임시대피소에 도착해 몸을 뉘였다. 아침이 되자 자식들이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왔지만 함씨 부부는 당장 오늘 밤을 어디에서 보내야 할지 고민이다.
"자식들도 월급으로 방 얻어사는 처지라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노인회관은 불이 안 붙었던데 회관으로 갈까."
이날 오전 아야진초등학교 대피소 입구에서 대한적십자 자원봉사 조끼를 입은 노승희(42)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서울=뉴시스】이윤희 기자 = 5일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에서 산불 피해로 집과 비닐하우스, 축사를 잃은 김명곤(70) 할아버지가 멍하니 앉아있다. 2019.04.05
용촌2리에 위치한 노씨의 친정집 역시 전날 밤 화마가 집어삼키고 말았다. 2층짜리 단독주택 1층이 통째로 잿더미가 돼 버렸다. 노씨는 전화로만 상황을 확인하고 직접 가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쪽이 통제가 돼서 가지도 못한다고 해요.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더 걱정스럽네요."
불에 타버린 노씨 친정집은 올해 65세인 어머니가 35년 전 직접 지은 집이다. 노씨는 그곳에서 15세 무렵부터 시집 가기 전까지 살았다. 직접 지은 집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상실감을 생각하며 노씨는 다시 한 번 눈물을 삼켰다.
"여기(아야진초등학교)로 오라고 했는데 못 오겠다고 하시네요, 집 때문에."
어머니가 대피소로 오지 않고 집 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1층이 다 타 버려 들어가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주민들과 함께 동네를 지키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7시17분께 고성군에서 발생한 산불이 속초, 인제 등 동해안 지역 일대로 번졌다. 정부는 5일 오전 9시부로 강원도 고성군, 속초시, 강릉시, 동해시, 인제군 일원에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소방당국은 날이 밝으면서 산림 28대와 국방 13대, 소방 6대, 임차 4대 등 총 51대 헬기를 동원해 진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고성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기준 아야진초등학교 임시대피소에는 주민 20여명과 외국학생 150명을 합쳐 200명이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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