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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출구' 못찾는 의정갈등…신뢰회복이 우선이다

등록 2025.01.01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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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출구' 못찾는 의정갈등…신뢰회복이 우선이다

[서울=뉴시스] 백영미 기자 = 2013년 개봉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은 스타 배우도, 막대한 제작비도 투입하지 않았지만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지적장애인 아버지 용구의 초등학생 딸 예승이를 향한 끊임없는 부성애를 그렸다.

동시에 마트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무고한 가장을 졸지에 잔인한 아동 살인범으로 만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드는 사법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했다. 무너진 사법 신뢰 속에서 용구와 7번방 수감자들이 연대해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도 담아냈다.

11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을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도 '무너진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의사들은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라며 정부를 향한 불신이 팽배해 있고, 정부는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직역 이기주의"로 치부하며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계의 정부를 향한 불신은 뿌리가 깊다. 의사들은 2020년 9월4일 의정합의를 통해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겠다고 대한의사협회(의협)와 합의한 보건복지부가 약속을 깼다며 강력 반발했다. "어차피 합의해도 정부가 또 무시할텐데 협의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부가 의료개혁 1차 실행 방안과 의학교육 여건 개선을 위한 투자 방안을 발표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지배적이다.

정부의 불신도 만만찮다. 지난해 5월 의사들이 1998년 이후 27년 만의 의대 증원을 반대하자 "직역 이기주의로, 번번이 반대해왔다"며 물러설 수 없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집단파업을 막겠다"며 지난 2월 각 수련병원에 전담팀을 배치해 전공의 근무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고 경찰도 배치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며 업무개시명령과 사직서수리금지명령도 내렸다.

문제는 신뢰가 무너져 있다 보니 사태 해결의 물꼬가 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정은 필수·지역 의료의 급속한 몰락에 공감하지만, 의사들은 잘못된 의료 정책에 따른 분포의 문제를 원인으로 보는 반면 정부는 의사 수가 늘면 해소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입장차를 좁혀 접점을 찾으려면 신뢰를 기반으로 소통해야 한다.

물론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의대 증원 갈등이 20년 넘게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누적된 불신이 적지 않은 데다 시간이 흐르면서 켜켜이 쌓이는 신뢰의 특성상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정 갈등 해소의 첫걸음은 상호 신뢰 회복이다. 신뢰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밑바탕이 되고, 결국 의료 서비스의 질에도 영향을 미쳐서다. 의사들이 의대 증원 정책과 근거에 불신을 가지면 사기가 저하되고 의료 현장을 대거 떠날 수도 있다.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 구축으로 가는 길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각기 다른 사연과 아픔을 가졌지만 용구의 부성애에 감동한 7번방 수감자들이 서로 신뢰하고 연대해 용구가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무너진 사법 신뢰의 회복을 보여줬듯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의사들도 미래 의료의 큰 방향을 설정하고 똘똘 뭉쳐 의정 간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한다.

지속 가능한 의료 시스템은 사회 구성원의 건강, 더 나아가 안녕과 직결된다. 의정은 환자와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고 의학 교육과 의료 현장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정부는 의료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의대 증원 결정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책 수정의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의료계는 전공의, 의대생 등 이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해 사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과거의 갈등을 딛고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역경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예상을 깨고 돌풍을 일으켰던 7번방의 선물처럼 을사년 새해 의료 정상화 소식이 기적처럼 찾아오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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