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기자조선 거부, 곧 식민사학·동북공정 수용…왜?
【서울=뉴시스】백암 박은식 한문본 ‘한국통사’(1915) 중 ‘기자조선’ 기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한국통사’(痛史·1915) 중 기자조선 관련 기록은 고구려-고려-조선 시대 조상의 시각과 일치한다. 게다가 신채호는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나오는 문구 ‘眞番朝鮮(진번조선)’을 ‘진번과 조선’이 아니라 ‘진조선과 번조선’으로 오역, 정체불명의 나라들을 만들어냈다.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을 신뢰할 수 없는 치명적 오류다.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신하국이 아닌 당당한 독립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은 걱정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일제 초기까지 기자를 숭배하고 기자조선을 인정했다. 독립운동가 백암(白巖)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증거다. 1910년 경술국치라는 재앙을 만나 울며 중국으로 망명한 백암은 상하이에서 한문본으로 이 책을 펴낸다.
백암은 “혼(魂)에 속하는 국사(國史)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국혼사관을 제시, 세계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머리말에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했으니, 대개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훼손됐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하니, 이 ‘한국통사’를 짓는 까닭이다”라면서 제2장 ‘역사의 대개(大槪)’에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은나라 태사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 따르는 이 5000명과 함께 동쪽 조선으로 올 때, 거주한 곳은 지금의 중국 봉천성 광녕현이었다. 단군을 그대로 따라(仍) 국호를 ‘조선’이라 했고,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8조의 법금을 세운 바,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바깥문을 닫지 아니했으며, 부녀자들은 지조가 곧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았다. 이처럼 어질고 현명한 덕화가 있는 고로, 주나라가 쇠잔할 때 공자가 그 땅에 가서 살고 싶어 했더라.(殷太史箕子避周東來從者五千, 居今奉天廣寧縣. 仍國號朝鮮, 以禮敎民, 設八條之禁, 民不相盜, 外戶不閉, 婦女貞信不淫. 有仁賢之化, 故周衰孔子欲居之)”
“기씨조선은 연나라와 더불어 접경이라…한나라 초기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무동왕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를 거느리고 망명,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와 조선의 번병(藩屛; 신하)이 되기를 청했다. 왕이 그 말을 믿고 벼슬과 토지를 하사해 서쪽 외곽지역을 지키게 해줬더니, 위만은 도리어 ‘한나라의 대병력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허위보고하면서 (자신이 왕의 신변을 지킬 수 있게끔 왕궁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허락을 받은) 위만은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습격해 기준 왕이 도주하자 스스로 즉위했다. 기준은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국의 왕이 되니, 기씨조선은 나라를 향유한 지가 900년이더라.”
이처럼 ‘한국통사’는 이전의 사서들처럼 기자조선과 고유 법령인 ‘8조법금’은 물론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과정과 ‘한국(韓國)’의 어원이 되는 ‘마한국(馬韓國)’을 모두 기록했다. 그런데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검토본에는 기자조선이 삭제돼 있고, 8조법금은 단군조선의 것으로 둔갑했으며, 한국의 어원은 다루지도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1915년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한국통사는 비밀리에 국내로 반입되어 일제의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그 대응책으로 1916년 일제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1922 조선사편찬위원회→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조직,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의 편찬을 서둘렀다.”(독립기념관 간행 한글판 영인본 ‘한국통사’ 10쪽, 1998)
【서울=뉴시스】‘사기(史記)’ 권115, ‘조선열전’(청나라 판본)
국혼이 위축되는 위기의 상황에서 신채호는 일제에 맞선다며 조선의 상고사를 나름대로 개편창제하려고 마음 먹는다. 1931년 조선일보에 ‘조선사’란 이름으로 연재하고, 1948년 단행본으로 펴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일본에 보란 듯 단군조선을 ‘대(大) 단군조선’으로 확대시켰지만 기자조선은 일제처럼 삭제하는 우를 범했다. 박 소장은 “기자동래설과 기자의 후손 기준 또한 인정하면서도 기준의 나라를 ‘불조선(?)’이라 칭하고 또 ‘신조선(?)’과 ‘말조선(?)’이란 근거 불명의 말을 만들어 이른바 ‘3조선’설을 주장, 우리 상고사를 어지럽혔다”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3조선설의 근거로 ‘사기’ 조선열전의 한 대목에 주목했다. 국내외 대다수 학자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고 번역한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塞.(조선왕 위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었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해 귀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변방 요새를 축조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사기 조선열전에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라고 오역했다.
주석 부분의 “徐廣曰: 一作莫”은 “서광이 말하기를, (眞番의 眞자는 莫자와 자형이 유사한 관계로) 한편 莫자로도 쓰였다”로 풀이해야 한다. 하지만 신채호는 “번(番)은 일에 막(莫)으로도 쓴다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眞莫朝鮮)’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라고 오역한 뒤 신조선과 말조선이라는 나라들을 스스로 창조해냈다. 박 소장은 “역사란 본래 사실대로 기술해 거기에서 흥망성쇠의 교훈을 얻는 것이 주목적인데,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 주가 되면 필히 이와 같은 왜곡이 발생한다”고 짚었다.
우리 상고사에 신조선말조선불조선이란 나라는 없다. 그러한 용어를 입증할 그 어떤 사료도 없다. 일제의 자극에 따른 반작용이었다지만, 신채호는 결과적으로 조선사편수회의 방침에 동조해 기자조선을 상고사에서 삭제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현 역사교과서 집필진도 일제의 방침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기자조선을 인정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말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기우다.
과거 동북공정 관련 우리와 중국 간 역사전쟁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나라는 고구려다. 중국 측은 “고구려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다.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신하로서 활동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지 독립국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서울=뉴시스】국정교과서 중학교 역사① 37쪽 ‘위만조선’ 부분. 본래 연나라 사람인 위만을 “요동 지역에 살던 인물”, 주석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인물”이라고 기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신하국이 아닌 독립국이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있다. ①‘서경(書經)’ 미자편: “기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고 했다.(箕子嘗言, 商其淪喪, 我罔爲臣僕)” ②‘상서(尙書)’ 홍범편: “주나라 무왕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했다.(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 ③‘사기’ 주본기: “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이긴 후 2년(무왕 13년)이 지나, 기자에게 하늘의 도를 물었다.(武王已克殷, 后二年, 問箕子…故問以天道)” ④‘사기’ 송미자세가: “이에 무왕은 곧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서는 아니었다.(於是武王乃封箕子于朝鮮而不臣也)”
무왕에게 하늘의 도인 홍범구주를 가르쳐준 스승의 자격으로 기자조선은 독립국임을 이렇게 공인받았다. 기자조선과 그 뒤의 부여가 주나라 역법을 거부하고 은력(殷曆)을 고수하고 백의문화를 견지했다는 사실, 즉 기자조선이 독립국이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는 지난 4일 ‘국정교과서 기자조선 퇴출, 알고보니 일제식민사학 탓’ 기사로 전했다. 박 소장은 “독립국인 미국을 영국은 건드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독립국인 기자조선을 현재의 중국이 시비 걸 아무런 명분이 없고, 억지 부린 동북공정은 전혀 효력이 없다”고 못 박았다.
한편, 국정 역사교과서 제작진이 ‘동국통감’의 기록을 근거로 단기 원년 BC2333년을 교과서에 제시해놓았으면, 같은 책에 나오는 단군조선의 역년 총 1048년이라는 기록도 제시해야 옳다. ‘동국통감’의 “단군은…상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됐는데, 1048년의 수명을 누렸다”라는 기록은 단군조선의 멸망 연도가 BC1286년이라는 말이다. 이토록 중요한 연대가 국정교과서에서 누락됐다.
국정교과서는 기자는 중국 출신이라 해 기자조선을 삭제한 반면, 위만은 중국 연나라 출신인데도 그 사실을 감추며 위만조선을 한국사로 기록했다. 중학교 역사① 37쪽에서는 “위만은 왕이 된 후에도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수도도 왕검성에서 옮기지 않았다. 이를 통해 위만이 고조선 계통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고 위만을 주석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기자도 조선이라는 국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수도도 왕검성이었으니 고조선 계통의 인물이다. 이와 관련한 중국 측 증언도 있다. 베이징대 대리총장과 국립타이완대 총장을 지낸 중국의 역사학자 푸스녠(傅斯年)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 “상나라와 동북은 본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하하류로 와서 나라를 세웠고, 상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동북(동북 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썼다.
박대종 소장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편향성은 곤란하다. 배신자 위만은 올려주고 왜 현인인 기자는 삭제하는가. 37쪽 주석 부분에 위만이 망명 시에 상투를 틀었다는 이유로 우호적으로 기재한 것 또한 검토를 요한다. 상투는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풍습이 아니다. 중국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에 가본 이들은 안다. 중국 진나라와 초나라 또한 상투를 틀었다는 사실을. 금번 국정 역사교과서 검토본은 그야말로 전면적인 검토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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